종이 동물원 - 켄 리우
[원서로 읽은 게 아니다. 한국어 번역본으로 읽었다. 책 표지가 한국어 본 보다 영어본이 더 예뻐서 올렸다.]
표제작인 '종이 동물원'은 보편적인 주제를 익숙한 소재를 통해 풀어나갔는데 결말 부분에서는 가슴이 찡해졌다. 미국인 백인 아버지와 '우편 배달' 신부인 중국인 어머니를 둔 남자가 이야기의 화자이다. 어릴 때 엄마가 만들어 주었던 종이 동물들이 신기한 마술로 저절로 움직여서 어린 시절 화자와 같이 놀아주었던 이야기로 시작해서 중국 근현대 여성의 수난사로 묵직하게 이야기가 끝난다.
'천생연분'은 AI의 디스토피아를 다루고 있다. 나도 집에서 구글홈(말로 명령이 가능한 AI 스피커)을 쓰고 있어서 더 재미있게 읽었다.
'즐거운 사냥을 하길'은 구성이 독특했다. 처음엔 요괴와 요괴 사냥꾼의 이야기였는데 갑자기 스팀 펑크로 확 장르 전환을 하더니 멋지게 끝이났다. 하지만 중간에 성매매 여성의 몸의 일부를 인공 부품으로 바꾸는 대목이 나온다. 이 대목에서 갑자기 욕조 물마개를 뽑아버린 것처럼 기분좋은 감상이 싱크홀로 확 빨려내려가는 이상한 기분이었다. '레귤러'는 아시아 성매매 여성만 대상으로 한 연쇄살인마 이야기를 대상으로 한다. 인간의 신체를 기계로 바꾸는 시대에서도 성매매 직업군은 사라지지 않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파'와 '모노노와레'는 세계관이 연결되는 것 같다. 새로운 정착지를 찾아서 인류를 정찰 우주선에 태워서 다른 별에 정착을 시도한다. 이 와중에 인간의 몸은 새로운 행성에 적응해서 예상할 수 없는 형태로 진화해나가고 이야기도 예상을 벗어난 방향으로 진행된다. 이 두 단편 말고도 '상급 독자를 위한 비교인지 그림책'도 공간적 배경이 지구와 많이 달라서 문장에 씌어진 세계의 모습을 그려내느라 상상력이 많이 필요한 SF 단편이었다.
'송사와 원숭이 왕'은 중국 전기 소설(고전 판타지) 형식을 취하고 있으나 청나라 초기 만주족의 학살을 고발하는 묵직한 소설이다.
책의 마지막 소설인 '역사에 종지부를 찍은 사람들'은 시간 여행 소재를 가지고 일본의 제국 시절 731 부대의 인간 대상 생체 실험을 고발하고 있다.
책에 실린 모든 소설들은 하나 흠잡을 데 없이 뛰어난 소설이다. 책 앞에 실린 소설들은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소설들이고 중반에 실린 소설들은 현실 지구와 시대 및 공간이 동떨어져있어서 읽는데 집중력과 상상력이 많이 필요한 단편들이고 책의 끝부분에 실린 단편들은 역사의 어두운 시절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무거운 소설들이다. 나는 이 책을 샀을 때 이 책의 앞부분에 실린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소설들만 기대했기에 책의 중후반 부는 부담감을 느끼며 먹기 싫은 음식을 억지로 먹듯이 읽었다.